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냉전시대 동독과 서독 베를린 장벽을 사이로 두고 세계 각국의 스파이가 모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의 어느 날 영국 MI6 비밀요원 제임스 개스코인이 베를린에서 살해된다.
개스코인은 동독의 비밀경찰이자 반역자인 스파이 글래스(에디 마산)로부터 시계를 전달받은 상태였고, 이 사건으로 시계는 행적을 감추게 된다.
사실 이 시계는 세계 각국의 스파이 명단이 담긴 핵폭탄 급 정보.
자신들의 치부가 될 세상에 공개돼서는 안 되는 이 시계를 차지하기 위해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은 독일 베를린 장벽을 사이로 두고 속고 속이는 첩보전을 벌인다.
28년 만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체제가 종식되는 평화의 분위기 이면을 그리고 있다.
한편, 영국 MI6의 베테랑 요원 로레인 브로튼(샤를리즈 테론)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시계를 회수하기 위해 베를린에 파견된다.
MI6의 베를린 지부장 데이빗 퍼시벌(제임스 맥어보이)과 접선을 하기도 전에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신분이 노출되는 위기에 처한다.
시작부터 일이 꼬여버린 로레인은 사라진 시계를 회수하고 중간에서 일을 조작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이중스파이 사첼의 정체를 밝혀야만 한다.
시계의 행방을 추적할수록 로레인은 왠지 모르게 각국의 스파이로부터 추적당하게 되고 점점 알 수 없는 음모에 휘말린다.
그러면서 동료라고 생각했던 퍼시벌의 거짓말이 하나둘씩 드러나게 되자 과연 믿을 수 있는지 의심해야 하는 상황.
결국 시계는 찾을 수 없고 스파이 명단을 기억하고 있는 시계의 제작자 스파이 글래스를 서독으로 탈출시켜야만 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 로레인.
그녀는 임무를 완료할 수 있을 것인가.
속이는 자를 속이는 건 두 배의 즐거움이라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이 말이 이 영화의 주된 플로우.
시종일관 회색빛인 베를린은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도시로 그려진다.
누가 적이고 누가 편인지 나조차도 어느 편인지 헷갈리는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악마와 싸우다 보면 악마가 된다는 말처럼 저마다 명분을 가졌지만 결국엔 서로가 악마가 되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한다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되어버린 퍼시벌과 이제 막 지옥으로 뛰어든 라살(소피아 부텔라)은 이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제부터 비밀이 없는 세상이라는 건 듣기 좋은 허울일 뿐.
서로 속고 속이며 진실은 여전히 감춰진 채 정의란 모호하다.
사첼은 누구?
극 중 숨겨진 인물이자 이중스파이 사첼.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끝까지 다 보고도 의문점이 남았다.
사실 표면적으로 드러났지만 그대로 믿기엔 뭔가 찝찝했었다.
물론 그가 누구인지 추측할 수 있는 증거나 정황이 영화에 몇 번 등장한다.
영화의 반전과도 이어진 부분이니 자세히 언급하진 않겠다.
영화 후반부에 다다르면 아마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거고 분명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이유로 끝까지 확신할 수 없다.
이번에 다시 보면서 눈에 들어온 건데 스치듯 지나가는 장면이라 놓치기 쉽다.
시계 속 명단의 일부
시계 속 스파이 명단에 올라있는 사첼 부분이다.
누군지 다 보여주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끝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의문점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스파이 글라스가 취한 행동이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이중 삼중 스파이를 그대로 믿을지 아니면 반전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지는 각자의 몫일 것이다.
롱테이크 액션의 놀라움!
첩보영화에서 서로 속고 속이고 누가 어느 편인지는 보통 헷갈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혼란 속에서 진상을 파악하는게 어쩌면 불필요한 일 일지도 모르겠다.
스토리야 어떻게 되건 누가 나쁜 놈이던 상관이 없다.
심지어는 내내 졸더라도 액션씬만 놓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정도로 이 영화의 액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영화 중반부에 약 10분짜리 롱테이크 액션씬이 등장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보는 이를 놀랍도록 한다.
10분짜리 원테이크! 이 문장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보면 그 한 장면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액션의 화려함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생각해보시라. 말 그대로 원테이크이다.
편집이 없다. 찍은 그대로 보여주는 날것이다. 오직 배우의 연습과 연기, 약간의 카메라 기법만이 존재한다.
그 한 테이크를 완성하려고 얼마나 많은 준비가 있었을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이미 화려하다고 단언한다.
개인적으로 오래전에 봤었던 옹박2 롱테이크가 떠올랐다.
당시에 아무것도 모르고 봤었는데 같이 보던 영화전공 친구에게 그 한 테이크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경험이 있다.
그때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대단함이었다.
편집이 아닌 실제로 느껴지는 배우의 거친 숨소리는 최고의 현장감을 선사한다.
서로 죽여야만 하는 싸움이라면 실제로 이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자동차씬으로 이어지는 롱테이크의 카메라 앵글은 현장감을 극대화해주고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엽문3에서도 카메라 앵글이 인상적이었는데 이 세 편의 영화에서 계단씬이란 공통점을 발견했다.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다 떠나서 사를리즈 테론의 10분짜리 무편집 액션만 잘 감상해도 이 영화를 본 의미가 생긴다.
반전 자체에는 아쉬울게 없다.
다만 결국 미국 영웅주의로의 마무리가 찝찝할 뿐.
이것도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는 거지 과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오락영화로써 잘 즐겼다면 그만이다.
Atomic Blonde 제목처럼 엄청난 그녀의 매력을 느끼는 걸로 충분하다.